< 어린왕자 > 를 읽고...
어린왕자. 내 기억으로는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 초등학교 6 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자주 들르지도 않던 책방에서 누군가가 집어준 이 책을 이제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다시금 읽으면서 과연 그 때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읽었을까 ?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그 때의 내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어린왕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여우와 어린왕자가 서로를 ‘길들이는’ 장면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관심 깊게 읽히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여우는 이렇게 말한다.
“넌 나에게 아직은 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일 뿐이야.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 또 너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에게 나는 다른 많은 여우들과 다를 바 없는 여우 한 마리에 지나지 않거든. 그렇지만 만약 네가 날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야...”
지금의 우리 현실을 돌이켜 보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학교붕괴, 교실붕괴, 사제지간의 폭력과 고발... 이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서 따로 따로 정확히 구분할 수 없지만, 어느 수준에서 각기 비슷한 원인을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결과를 가지는 현상들이다.
일단 학교붕괴는 차후에 논하기로 하고, 교실붕괴 현상을 살펴보자. 교실붕괴를 정의하자면, 학급내의 유대관계가 무너지면서 서로 간의 불신이 확산되고,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개인들로 파편화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교실붕괴 현상의 원인을 교실외적 요소에서 찾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는 학교가 독점해왔던 정보 제공의 역할을 이제는 사설 입시 학원이라든지, 인터넷 따위에서 원하는 정보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학교에서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점차 학교 생활에 소홀해지게되고 그런 상황에서 학급내의 유대를 기대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른다. 이 부분에서 교실붕괴는 학교붕괴와 맞물리게 된다. 왜냐하면 학교붕괴는 학교가 그 자체의 기능성을 상실하게 되어, 구성원들이 그로부터 이탈하는 현상이라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실붕괴, 아울러 학교붕괴의 원인에 이러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비판에는 적어도 ‘인간’ 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왜곡되어 있는 우리나라 입시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정보’ 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일반적인 ‘정보’ 가 아니라, 오직 대학 입시에 관련된 ‘입시’ 정보를 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의 학교가 어느 정도 입시 준비 기관의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학교에는 입시 준비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이 부분을 교육 사회학적 입장에서 교육과정을 분석할 때 적용하는 ‘잠재적 교육 과정’ 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잠재적 교육 과정은 수업 시간표로 대표되는 ‘명시적 교육 과정’ 과는 대비되는데, 지식 정보 전달이 주를 이루는 교육 과정을 ‘명시적 교육 과정’ 이라고 부른다면, ‘잠재적 교육 과정’ 은 그 이외의 과정, 곧 학생으로서 체험하게 되는 경험 일반의 과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수업 시간에는 조용해야 한다든지, 선생님께 인사를 드려야한다든지, 또는 교실에서는 실내화를 신어야 한다든지 따위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초중등교육을 받은 이라면 누구나가 이런 기억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을 다그치던 교사, 일방적으로 지키기를 강요당하던 교칙, 누구나 똑같이 잘라야 했던 머리... 이런 것들이 우리가 겪게 되는 잠재적 교육 과정의 모습이다.
이런 잠재적 교육 과정의 분석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바로 ‘권위주의’ 이다. 어느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숨막힐 것만 같은 수직적 위계구조. 감히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이런 환경 속에서 적어도 ‘인간’ 은 살 수가 없다. 요즘은 비교적 잠잠하지만, 한동안 뉴스와 신문지상을 장식했던 ‘체벌한 교사에 대한 학생의 고발’ 따위는 바로 이러한 권위주의적 교육 구조 자체가 생산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면,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두발 자유화’ 에 대한 중고등학생들의 요구는 학교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에 대해 학생들 스스로가 자각하고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권리를 찾아가려는 시도의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다시 ‘길들이기’ 를 생각해 보자.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이야기했던 ‘길들이기’ 는 결코 어느 일방의 길들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쌍방의 길들이기였다. 여우는 분명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 앞에 !서로! 곧 쌍방향은 존재할 수 없다. 오직 일방향만이 있을 뿐이다. 위에서 아래로의 일방향, 곧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학생과 교사, 교사와 교사, 학생과 학생은 서로에게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고, 그 관심이 자기에게만 집중되는, 이기적이고 자폐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파편화된 개인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대의 흐름을 뒤따르지 못한다는 것이 교실붕괴/학교붕괴의 원인이라면, 사교육의 민첩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그 외적 측면이고, 근대적 수직 위계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학생들에게 왜곡된 ‘길들이기’ 를 강요한 권위주의는 그 내적 측면이다. 어쩌면 지금의 교실붕괴/학교붕괴는 너무나도 늦게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어린왕자’ 의 첫부분으로 돌아가보자. 화자는 자신의 어릴적 기억을 더듬으며,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면 어느 누구나 ‘모자를 그렸군...’ 이라고 말을 하지만, 속이 보이는 보아뱀 그림을 보여주면 그제야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렇지만 화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런 그림일랑 집어치우고, 지리나 역사, 혹은 산수나 문법에나 관심을 가져라’ 는 말뿐이다. 그러나 어린왕자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었을 때, 어린왕자는 그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정확히 알아맞힌다.
이 부분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째서 ‘어른’에게는 단순한 ‘모자’ 일 뿐인 것이, ‘어린’왕자에게는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 으로 보이는 것일까. 여기에서 어린이와 어른은 생물학적 나이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각각 어떤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사고가 자유로운 이들과 사고가 경직된 이들. 혹은 열린 사고의 소유자와 닫힌 사고의 소유자. 또는 역설을 이해하는 자와 통념에 의존하는 자.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마음으로도 볼 수 있는 자와 눈으로만 보는 자.
이쯤 우리의 교육현장을 살펴보자. 초등학교는 어느 정도 나아지고 있지만,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언제나 ‘정상성’ 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직 한가지만이 편집증적으로 강조되고 있으며, 그것 외에는 모두가 그른 것이라고 가르쳐지고 있다. 그것 하나만이 옳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만을 암기하면 되고, 아니 암기해야만 하고, 다른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아니 생각해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이런 교육과정을 시행하는 중고등학교는 붕어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 버린다. 그곳을 나오게 되면 누구나가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일종의 폭력이 자리잡고 있다. ‘진리’ 라고 자처하는 교과서, ‘진리의 담지자’ 라고 자처하는 교사.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들을 일렬로 세우고 있는 입시 제도. 이런 현실 속에서 ‘다름’ 은 결코 사유될 수 없다. 설사 ‘다름’ 에 접근했다고 하더라도, 주위의 반응은 어린왕자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처럼, 이해할 수 없다거나 또는 다른 것을 권하는 것 따위뿐이다.
어린왕자는 분명 이러한 세태에 반기를 든다. 보아뱀이 모자로 보이는 세상. 상상력이 극도로 억압받는 세상. 오로지 ‘한가지’만을 강요하는 세상.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비밀 한가지를 말해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보아뱀 속에 있는 코끼리. ‘눈물의 나라’ 에 홀로 있는 장미. 어디선가 빛나고 있을 어린왕자의 별. 이 모든 것이 ‘눈’ 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마음’ 으로만 볼 수 있다.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에 보이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 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것들 중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말이다. 나와 관계 맺어진 것으로서. 그러나 언제나 입시를 준비하며 암기에 열중해야만 하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외우고 있는 것들의 ‘의미’ 를 살필 겨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개를 돌릴 수도, 뒤돌아 갈 수도 없다. 오직 정해진 한 길만을 따라 걸어갈 뿐이다. 그 끝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들은 끊임없이 지나가는 전철 안의 승객들이다. 아무런 목표없이 방황하는 그런 승객들.
그리고 어린왕자는 자꾸만 묻는다. 어른들은 어째서 숫자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왜 자꾸 ‘양’ 에만 집착을 하는 것일까. 라고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양’ 에 앞서는 ‘질’ 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양’ 은 ‘정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곧 많고 적음.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준이 되는 한 측면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질’ 이다. 예를 들어, 1 kg 과 1 m 는 같은 ‘하나’이지만 그것의 기준이 하나는 무게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이기 때문에, 같을 수가 없다. 곧 양적 측면은 같을지 모르지만, 질적 측면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숫자’ 에만 익숙해져 있는 ‘어른’ 에게 이것은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 교육 현실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양’ 은 ‘점수’ 이다. 과목별 점수, 더 나아가 총점, 평균 점수까지. 모든 것이 숫자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것이 그 숫자로서 평가받는다. 어린왕자가 그토록 비판하는 어른의 모습이 우리의 교육 현실에 그래도 투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그렇게 양에 집착하는 것일까 ? 그것은 ‘효율’ 때문이 아닐까 ? 일단 양화된 자료들은 쉽게 나열되어, 일렬로 세워 놓을 수가 있다. 그것이 어떤 기준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들은 그 ‘효율’ 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효율’ 은 ‘숫자’ 가 감추고 있는 일종의 마약인 것이다.
여기서 어린왕자가 지구를 여행하면서 만난 상인의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
“이걸 먹으면 시간이 아주 많이 절약되거든. 전문가들이 계산해 봤는데, 일주일에 무려 53 분을 절약할 수 있대.”
이 때, 어린왕자는 그 53 분 동안에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만, 상인은 딱히 대답하지 못한다.
상인에게는 절약되는 53 분의 ‘양’ 이 중요할 뿐이지, 그동안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양’ 을 채울 수 있는 ‘질’ 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린왕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만약 내가 53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난 샘이 있는 곳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갈 텐데...’
어린왕자는 거짓스러운 ‘숫자 놀음’ 에 빠지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갈증이 해소된다는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갈증이 해소되기까지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어린왕자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다. ‘얼마’의 점수를 받았는가 ? 일류대학에 ‘몇’ 명의 학생을 보냈는가 ? ‘몇’ 개의 상을 받았는가 ? 따위로 평가받는 게 현실이다. ‘어떤’ 일을 잘하는가 ? ‘어떤’ 상을 받았는가 ? 는 이미 그 다음의 관심거리이다.
‘효율’ 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가고 있는 ‘삶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결과’ 와 ‘빠름’ 에 종속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가끔은 과정과 느림의 여유를 느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우리는 다시금 여우의 말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젠 뭔가를 진정으로 알게 될 시간이 없어졌어. 그들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물건을 가게에서 살 뿐이거든.”
우리의 교육 현실은 새로움을 터부시한다. 아니 ‘다름’ 자체를 싫어한다. 그들은 언제나 똑같기를 원한다. 이런 현실에서 주입식 교육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군사독재의 결과이든, 입시 제도에 최대한 적응한 암죽식 교육의 결과이든. 이런 현실 속에서 각자의 개성에 맞는 교육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길들여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어져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눈앞에 놓여 있는.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어느새 ‘어린왕자’ 는 ‘어른’ 이 되어 버린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이 말을 기억해야만 한다.
“별은 침묵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별이 똑같지는 않다.”
자기 나름대로의 ‘다른’ 시각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린왕자’ 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의 폭력에 대한 ‘여럿’의 작은 반란을, 눈앞의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모습을, 객관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가는 상상력을. ‘양’ 에게 가려진 ‘질’ 을. ‘효율’ 에 자리를 빼앗기는 ‘삶의 가치’를. ‘어린왕자’ 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이라고. 우리의 교육 현실이 생텍쥐페리의 사랑과 같은 모습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는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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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썼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다시 올린다.
‘어린왕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여우와 어린왕자가 서로를 ‘길들이는’ 장면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관심 깊게 읽히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여우는 이렇게 말한다.
“넌 나에게 아직은 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일 뿐이야.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 또 너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에게 나는 다른 많은 여우들과 다를 바 없는 여우 한 마리에 지나지 않거든. 그렇지만 만약 네가 날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야...”
지금의 우리 현실을 돌이켜 보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학교붕괴, 교실붕괴, 사제지간의 폭력과 고발... 이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서 따로 따로 정확히 구분할 수 없지만, 어느 수준에서 각기 비슷한 원인을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결과를 가지는 현상들이다.
일단 학교붕괴는 차후에 논하기로 하고, 교실붕괴 현상을 살펴보자. 교실붕괴를 정의하자면, 학급내의 유대관계가 무너지면서 서로 간의 불신이 확산되고,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개인들로 파편화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교실붕괴 현상의 원인을 교실외적 요소에서 찾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는 학교가 독점해왔던 정보 제공의 역할을 이제는 사설 입시 학원이라든지, 인터넷 따위에서 원하는 정보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학교에서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점차 학교 생활에 소홀해지게되고 그런 상황에서 학급내의 유대를 기대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른다. 이 부분에서 교실붕괴는 학교붕괴와 맞물리게 된다. 왜냐하면 학교붕괴는 학교가 그 자체의 기능성을 상실하게 되어, 구성원들이 그로부터 이탈하는 현상이라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실붕괴, 아울러 학교붕괴의 원인에 이러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비판에는 적어도 ‘인간’ 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왜곡되어 있는 우리나라 입시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정보’ 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일반적인 ‘정보’ 가 아니라, 오직 대학 입시에 관련된 ‘입시’ 정보를 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의 학교가 어느 정도 입시 준비 기관의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학교에는 입시 준비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이 부분을 교육 사회학적 입장에서 교육과정을 분석할 때 적용하는 ‘잠재적 교육 과정’ 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잠재적 교육 과정은 수업 시간표로 대표되는 ‘명시적 교육 과정’ 과는 대비되는데, 지식 정보 전달이 주를 이루는 교육 과정을 ‘명시적 교육 과정’ 이라고 부른다면, ‘잠재적 교육 과정’ 은 그 이외의 과정, 곧 학생으로서 체험하게 되는 경험 일반의 과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수업 시간에는 조용해야 한다든지, 선생님께 인사를 드려야한다든지, 또는 교실에서는 실내화를 신어야 한다든지 따위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초중등교육을 받은 이라면 누구나가 이런 기억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을 다그치던 교사, 일방적으로 지키기를 강요당하던 교칙, 누구나 똑같이 잘라야 했던 머리... 이런 것들이 우리가 겪게 되는 잠재적 교육 과정의 모습이다.
이런 잠재적 교육 과정의 분석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바로 ‘권위주의’ 이다. 어느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숨막힐 것만 같은 수직적 위계구조. 감히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이런 환경 속에서 적어도 ‘인간’ 은 살 수가 없다. 요즘은 비교적 잠잠하지만, 한동안 뉴스와 신문지상을 장식했던 ‘체벌한 교사에 대한 학생의 고발’ 따위는 바로 이러한 권위주의적 교육 구조 자체가 생산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면,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두발 자유화’ 에 대한 중고등학생들의 요구는 학교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에 대해 학생들 스스로가 자각하고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권리를 찾아가려는 시도의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다시 ‘길들이기’ 를 생각해 보자.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이야기했던 ‘길들이기’ 는 결코 어느 일방의 길들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쌍방의 길들이기였다. 여우는 분명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 앞에 !서로! 곧 쌍방향은 존재할 수 없다. 오직 일방향만이 있을 뿐이다. 위에서 아래로의 일방향, 곧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학생과 교사, 교사와 교사, 학생과 학생은 서로에게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고, 그 관심이 자기에게만 집중되는, 이기적이고 자폐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파편화된 개인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대의 흐름을 뒤따르지 못한다는 것이 교실붕괴/학교붕괴의 원인이라면, 사교육의 민첩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그 외적 측면이고, 근대적 수직 위계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학생들에게 왜곡된 ‘길들이기’ 를 강요한 권위주의는 그 내적 측면이다. 어쩌면 지금의 교실붕괴/학교붕괴는 너무나도 늦게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어린왕자’ 의 첫부분으로 돌아가보자. 화자는 자신의 어릴적 기억을 더듬으며,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면 어느 누구나 ‘모자를 그렸군...’ 이라고 말을 하지만, 속이 보이는 보아뱀 그림을 보여주면 그제야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렇지만 화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런 그림일랑 집어치우고, 지리나 역사, 혹은 산수나 문법에나 관심을 가져라’ 는 말뿐이다. 그러나 어린왕자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었을 때, 어린왕자는 그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정확히 알아맞힌다.
이 부분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째서 ‘어른’에게는 단순한 ‘모자’ 일 뿐인 것이, ‘어린’왕자에게는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 으로 보이는 것일까. 여기에서 어린이와 어른은 생물학적 나이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각각 어떤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사고가 자유로운 이들과 사고가 경직된 이들. 혹은 열린 사고의 소유자와 닫힌 사고의 소유자. 또는 역설을 이해하는 자와 통념에 의존하는 자.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마음으로도 볼 수 있는 자와 눈으로만 보는 자.
이쯤 우리의 교육현장을 살펴보자. 초등학교는 어느 정도 나아지고 있지만,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언제나 ‘정상성’ 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직 한가지만이 편집증적으로 강조되고 있으며, 그것 외에는 모두가 그른 것이라고 가르쳐지고 있다. 그것 하나만이 옳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만을 암기하면 되고, 아니 암기해야만 하고, 다른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아니 생각해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이런 교육과정을 시행하는 중고등학교는 붕어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 버린다. 그곳을 나오게 되면 누구나가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일종의 폭력이 자리잡고 있다. ‘진리’ 라고 자처하는 교과서, ‘진리의 담지자’ 라고 자처하는 교사.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들을 일렬로 세우고 있는 입시 제도. 이런 현실 속에서 ‘다름’ 은 결코 사유될 수 없다. 설사 ‘다름’ 에 접근했다고 하더라도, 주위의 반응은 어린왕자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처럼, 이해할 수 없다거나 또는 다른 것을 권하는 것 따위뿐이다.
어린왕자는 분명 이러한 세태에 반기를 든다. 보아뱀이 모자로 보이는 세상. 상상력이 극도로 억압받는 세상. 오로지 ‘한가지’만을 강요하는 세상.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비밀 한가지를 말해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보아뱀 속에 있는 코끼리. ‘눈물의 나라’ 에 홀로 있는 장미. 어디선가 빛나고 있을 어린왕자의 별. 이 모든 것이 ‘눈’ 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마음’ 으로만 볼 수 있다.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에 보이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 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것들 중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말이다. 나와 관계 맺어진 것으로서. 그러나 언제나 입시를 준비하며 암기에 열중해야만 하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외우고 있는 것들의 ‘의미’ 를 살필 겨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개를 돌릴 수도, 뒤돌아 갈 수도 없다. 오직 정해진 한 길만을 따라 걸어갈 뿐이다. 그 끝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들은 끊임없이 지나가는 전철 안의 승객들이다. 아무런 목표없이 방황하는 그런 승객들.
그리고 어린왕자는 자꾸만 묻는다. 어른들은 어째서 숫자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왜 자꾸 ‘양’ 에만 집착을 하는 것일까. 라고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양’ 에 앞서는 ‘질’ 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양’ 은 ‘정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곧 많고 적음.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준이 되는 한 측면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질’ 이다. 예를 들어, 1 kg 과 1 m 는 같은 ‘하나’이지만 그것의 기준이 하나는 무게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이기 때문에, 같을 수가 없다. 곧 양적 측면은 같을지 모르지만, 질적 측면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숫자’ 에만 익숙해져 있는 ‘어른’ 에게 이것은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 교육 현실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양’ 은 ‘점수’ 이다. 과목별 점수, 더 나아가 총점, 평균 점수까지. 모든 것이 숫자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것이 그 숫자로서 평가받는다. 어린왕자가 그토록 비판하는 어른의 모습이 우리의 교육 현실에 그래도 투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그렇게 양에 집착하는 것일까 ? 그것은 ‘효율’ 때문이 아닐까 ? 일단 양화된 자료들은 쉽게 나열되어, 일렬로 세워 놓을 수가 있다. 그것이 어떤 기준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들은 그 ‘효율’ 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효율’ 은 ‘숫자’ 가 감추고 있는 일종의 마약인 것이다.
여기서 어린왕자가 지구를 여행하면서 만난 상인의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
“이걸 먹으면 시간이 아주 많이 절약되거든. 전문가들이 계산해 봤는데, 일주일에 무려 53 분을 절약할 수 있대.”
이 때, 어린왕자는 그 53 분 동안에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만, 상인은 딱히 대답하지 못한다.
상인에게는 절약되는 53 분의 ‘양’ 이 중요할 뿐이지, 그동안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양’ 을 채울 수 있는 ‘질’ 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린왕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만약 내가 53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난 샘이 있는 곳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갈 텐데...’
어린왕자는 거짓스러운 ‘숫자 놀음’ 에 빠지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갈증이 해소된다는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갈증이 해소되기까지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어린왕자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다. ‘얼마’의 점수를 받았는가 ? 일류대학에 ‘몇’ 명의 학생을 보냈는가 ? ‘몇’ 개의 상을 받았는가 ? 따위로 평가받는 게 현실이다. ‘어떤’ 일을 잘하는가 ? ‘어떤’ 상을 받았는가 ? 는 이미 그 다음의 관심거리이다.
‘효율’ 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가고 있는 ‘삶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결과’ 와 ‘빠름’ 에 종속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가끔은 과정과 느림의 여유를 느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우리는 다시금 여우의 말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젠 뭔가를 진정으로 알게 될 시간이 없어졌어. 그들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물건을 가게에서 살 뿐이거든.”
우리의 교육 현실은 새로움을 터부시한다. 아니 ‘다름’ 자체를 싫어한다. 그들은 언제나 똑같기를 원한다. 이런 현실에서 주입식 교육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군사독재의 결과이든, 입시 제도에 최대한 적응한 암죽식 교육의 결과이든. 이런 현실 속에서 각자의 개성에 맞는 교육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길들여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어져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눈앞에 놓여 있는.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어느새 ‘어린왕자’ 는 ‘어른’ 이 되어 버린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이 말을 기억해야만 한다.
“별은 침묵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별이 똑같지는 않다.”
자기 나름대로의 ‘다른’ 시각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린왕자’ 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의 폭력에 대한 ‘여럿’의 작은 반란을, 눈앞의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모습을, 객관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가는 상상력을. ‘양’ 에게 가려진 ‘질’ 을. ‘효율’ 에 자리를 빼앗기는 ‘삶의 가치’를. ‘어린왕자’ 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이라고. 우리의 교육 현실이 생텍쥐페리의 사랑과 같은 모습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는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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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썼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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