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각기동대 > 를 보고...
‘공각기동대’ 를 보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애니의 어디를 보아도 ‘공각기동대’ 라는 말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해적판 ? 명시적인 제목은 ‘Ghost in the Shell' 이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던 작품이라 기대도 컸고, 어떤 두려움도 많았다. 단 한 번을 보고서 어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느낌이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각기동대’ 는 디지털 문명 속의 ‘실존’ 에 관한 질문이다.
몇가지 재미있는 질문들이 나온다. ‘생명’ 의 정의 ?
인형사와 6과에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각자의 생명관이 드러난다. 아마도 6 과 사람들이 고전적인 생명관을 유지하고 있다면, 인형사 - 그 위상상 - 는 보다 진보적(?)인 생명관을 주장한다. 6과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생명이 아니다. 너는 단지 프로그램일 뿐이다. 하지만 인형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비록 내가 6과의 방어벽 - 용어가 정확치 않음 ^^; - 에 쫓겨 이 곳에 있지만, 이 곳에 남은 것은 내 의지이다. 따라서 난 하나의 생명체이다. 인공성(artificiality)과 진정성(authenticity)의 대립. 인형사의 의미 심장한 한마디. ‘너희는 새로운 생명관을 확립하는 것에 소홀했다’
‘공각기동대’ 에는 여러 종류의 생명 모델이 나온다. 순수(?) 인간, 몸의 많은 부분이 의체로 구성된 인간, 영혼을 해킹당한 인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프로그램.
‘공각기동대’ 는 바로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의 경계를 묻고 있다. 참으로 인상적인 말. ‘과학은 생명을 정의할 수 없다’. 이 말은 차라리 지금의 과학 수준을 꼬집는 것이라기 보다는 과학에만 의존하는 생명관을 비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각기동대는 비록 우리가 생물학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는 생명관조차도 많은 혼란을 겪고 있지만 이보다 나아가서 기계 수준, 더 나아가 인공지능과 디지털 문명의 발달 속에서 예견되는 디지털 생명을 아우를 수 있는 생명관을 확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한가지.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
‘소령’ 은 재미있는 취미가 있다. 깊은 물 속으로 잠수하는 것.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수면으로 떠오를 때 ‘또 다른 나’ 를 보는 것 같다고.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무의식의 심연이 의식에 비추어지는 모습을. 이 속에서 기존의 ‘나’ 가 가지는 자율이 급속히 붕괴된다. ‘나’ 의 정체성은 갈 곳을 잃는다. 프로그램이 시키는 것이 마치 자신의 자유의지인냥 착각하는 ‘나’ 일뿐. 우리에게는 ‘환상’ 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기억’ 이라고 말한다. 이미 주어져 있는 ‘기억’. 영혼을 해킹당한 인간들. 그들이 자신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새로이 ‘주입’ 된 ‘기억’ 일 뿐이다.
하지만 ‘인형사’ 의 말 속에서 또 다른 ‘나’ 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네트를 돌아다니다 가까스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주관적인 ‘기억’ 곧 ‘환상’으로부터 ‘기억의 편린’ 곧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 를 찾아가는 것으로 방향이 바뀜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정체성’ 이라는 것은 일방적, 폐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개방적으로 규정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정령계’ 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정령계에는 어떤 질료만이 가득하고, 어떤 형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정령계를 방문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잊고 그 질료 속으로 동화되어 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자만이 정령왕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개방성, 관계성으로써의 정체성이 인형사가 주장하는 ‘나’ 의 다른 의미이다.
끝으로 ‘복사’ 와 ‘진화’ 를 구분한다. 또는 ‘단일’ 과 ‘다양’ 의 구분.
인형사는 ‘죽음’ 을 수동적 결과가 아니라 능동적 권리로 해석한다. 변하지 않는 단일을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권리. 그 속에서만이 변화가 생겨날 수 있고, 그것만이 그 자체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 인형사는 불사조 피닉스의 역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 불사조.
인형사와 소령의 결합은 이런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자신의 규정(복사/단일)을 벗어날 수 없지만 관계적이고 개방적인 인형사. 생성/변화(진화/다양)할 수 있지만 일방적이고 폐쇄적인 소령. 이 둘의 긍정적 종합. 인형사의 말대로 이 종합에는 인형사도 소령도 없다. 오직 그들의 종합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Ghost in the Shell' 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할, 정립해야 할,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정체성을 생각할수록 제약당한다’
-----
오래전 글이다. 다시 올린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각기동대’ 는 디지털 문명 속의 ‘실존’ 에 관한 질문이다.
몇가지 재미있는 질문들이 나온다. ‘생명’ 의 정의 ?
인형사와 6과에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각자의 생명관이 드러난다. 아마도 6 과 사람들이 고전적인 생명관을 유지하고 있다면, 인형사 - 그 위상상 - 는 보다 진보적(?)인 생명관을 주장한다. 6과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생명이 아니다. 너는 단지 프로그램일 뿐이다. 하지만 인형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비록 내가 6과의 방어벽 - 용어가 정확치 않음 ^^; - 에 쫓겨 이 곳에 있지만, 이 곳에 남은 것은 내 의지이다. 따라서 난 하나의 생명체이다. 인공성(artificiality)과 진정성(authenticity)의 대립. 인형사의 의미 심장한 한마디. ‘너희는 새로운 생명관을 확립하는 것에 소홀했다’
‘공각기동대’ 에는 여러 종류의 생명 모델이 나온다. 순수(?) 인간, 몸의 많은 부분이 의체로 구성된 인간, 영혼을 해킹당한 인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프로그램.
‘공각기동대’ 는 바로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의 경계를 묻고 있다. 참으로 인상적인 말. ‘과학은 생명을 정의할 수 없다’. 이 말은 차라리 지금의 과학 수준을 꼬집는 것이라기 보다는 과학에만 의존하는 생명관을 비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각기동대는 비록 우리가 생물학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는 생명관조차도 많은 혼란을 겪고 있지만 이보다 나아가서 기계 수준, 더 나아가 인공지능과 디지털 문명의 발달 속에서 예견되는 디지털 생명을 아우를 수 있는 생명관을 확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한가지.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
‘소령’ 은 재미있는 취미가 있다. 깊은 물 속으로 잠수하는 것.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수면으로 떠오를 때 ‘또 다른 나’ 를 보는 것 같다고.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무의식의 심연이 의식에 비추어지는 모습을. 이 속에서 기존의 ‘나’ 가 가지는 자율이 급속히 붕괴된다. ‘나’ 의 정체성은 갈 곳을 잃는다. 프로그램이 시키는 것이 마치 자신의 자유의지인냥 착각하는 ‘나’ 일뿐. 우리에게는 ‘환상’ 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기억’ 이라고 말한다. 이미 주어져 있는 ‘기억’. 영혼을 해킹당한 인간들. 그들이 자신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새로이 ‘주입’ 된 ‘기억’ 일 뿐이다.
하지만 ‘인형사’ 의 말 속에서 또 다른 ‘나’ 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네트를 돌아다니다 가까스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주관적인 ‘기억’ 곧 ‘환상’으로부터 ‘기억의 편린’ 곧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 를 찾아가는 것으로 방향이 바뀜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정체성’ 이라는 것은 일방적, 폐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개방적으로 규정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정령계’ 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정령계에는 어떤 질료만이 가득하고, 어떤 형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정령계를 방문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잊고 그 질료 속으로 동화되어 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자만이 정령왕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개방성, 관계성으로써의 정체성이 인형사가 주장하는 ‘나’ 의 다른 의미이다.
끝으로 ‘복사’ 와 ‘진화’ 를 구분한다. 또는 ‘단일’ 과 ‘다양’ 의 구분.
인형사는 ‘죽음’ 을 수동적 결과가 아니라 능동적 권리로 해석한다. 변하지 않는 단일을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권리. 그 속에서만이 변화가 생겨날 수 있고, 그것만이 그 자체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 인형사는 불사조 피닉스의 역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 불사조.
인형사와 소령의 결합은 이런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자신의 규정(복사/단일)을 벗어날 수 없지만 관계적이고 개방적인 인형사. 생성/변화(진화/다양)할 수 있지만 일방적이고 폐쇄적인 소령. 이 둘의 긍정적 종합. 인형사의 말대로 이 종합에는 인형사도 소령도 없다. 오직 그들의 종합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Ghost in the Shell' 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할, 정립해야 할,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정체성을 생각할수록 제약당한다’
-----
오래전 글이다. 다시 올린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