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학교론 비판
교육. 이만큼 관심을 끌고 있는 화두도 드물 것이다. 혹자는 이런 관심 마저도 부족한 것이라 말을 하지만 말이다. 이한씨가 쓴 '학교를 넘어서' 를 접하게 된 것은 작년, 98 년 2 학기 때였다. 그때 내게는 이 책, '학교를 넘어서' 와 천보선 김학한씨가 공저한 '신자유주의와 한국교육의 진로' 라는 책이 있었다. 굳이 구분을 짓자면, '학교를 넘어서' 는 주로 탈학교론의 입장에 서 있었고, '신자유주의와 한국교육의 진로' 는 그와는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한씨가 '학교를 넘어서' 를 쓰면서 주로 의존했던 사람은 탈학교론의 주창자인 일리치, 그리고 라이만, 게토, 이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닐들이 있다.
우선 전자의 사람들을 살펴보자. 이들의 의견은 학교를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학교를 지배계급의 의식 주입소로써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학교의 발생 상황을 해석하면서 자본의 요구에 부합하는 노동자들을 길러내기 위해서 학교, 근대적 학교가 만들어졌다고 결론짓는다. 비록 이런 학교 때문에 노동자들의 파생적 이익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학교의 본질은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발생학적 분석은 아니지만, 푸코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다. 푸코는 권력을 분석하면서, 학교와 군대가 일련의 주체를 생산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근대적 규율 체계로써의 학교말이다. 그렇다면 닐에게서는 어떤 것을 얻고 있는가. 닐은 '자율교육' 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전자의 사람들이 계급의 관점에서 학교의 해체를 주장했다면, 닐의 경우 '권리' 의 측면으로 교육 문제를 바라보았다고 볼 수 있다.
이한씨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이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학교의 경직성, 교사와 학생 사이에 벌어지는 종속 관계, 학생들의 객체화 따위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학교의 해체로써 나아간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써 교육화폐 운동이나, 홈스쿨링 그리고 네터워크 구성, 동아리의 활용 따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일단 학교가 과연 지배 계급의 이해 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가. '신자유주의와 한국교육의 진로' 에서 천보선씨와 김학한씨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들은 공교육 개념의 이면을 살핀다. 이들에 따르면 근대적 개념의 공교육은 프랑스 대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는 교육이라는 것은 몇 몇 귀족들, 특권층에기만 가능한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부르주아지들이 프랑스 대혁명을 승리로 이끌면서 교육은 그런 특권층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들 부르주아지까지도 포괄하기에 이른다. 또한 산업혁명 이후 프로레타리아트에게 있어, 교육은 부르주아지의 이해는 물론 그들 자신의 의식 함양에도 기여했다고 본다. 게다가 공교육으로써의 개념(국가 비용 부담)을 확고히 하게 되는 것은 이들 프로레타리아트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로 대표되고 있는 공교육은 바로 민중의 투쟁을 통해 이루어낸 성과라는 것이다.
공교육이라는 입장에서 보다 더 밀고 나아가야 하겠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교육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함께' 라는 의미밖에 가지지 못한다. 또는 좀더 완화해서 생각한다면 '국가의 교육 비용 보조' 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런 특성 때문에 공교육을 받으면서도 사교육비가 공교육에 포함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고 있다. 문제는 바로 사교육비이다. 탈학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록 계급의 관점에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현실에 있어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은 교육 예산이 늘어나기는 커녕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며, 더욱 나아가 사교육비의 지출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하며, 그 경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학교를 해체하고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홈스쿨링을 보자. 홈스쿨링을 하게 되면, 그 상황에서 교육자는 부모 또는 그 주위에서 수고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노동 계급의 부모를 생각해 보자. 아니 빈곤층을 보자. 이들에게 있어 자기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는 현실적인 능력이 있을까 ? 아니 그 주위에서 그럴만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까 ? 우리는 주위에서 홈스쿨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들을 분석해보자. 그들은 그것을 성공할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또는 어떤 모임을 만들어서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들어 탈학교 모임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지만, 과연 그 모임들이 홈스쿨링에 가해진 비판을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대학 입시' 라는 것이다. 소위 학력주의 또는 학벌주의, 달리 말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써의 지위경쟁이론 또는 임금경쟁이론으로 뒷받침 되고 있는 괴물 말이다. 이한씨는 자신의 책에서 '대학 입시' 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읽은지가 거의 1 년이 다 되어가고 지금 옆에 없는 상황이라... ^^;)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것으로써 학생들의 기계화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대안으로써 대학입시와 관련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제시된 대안은 대학입시에 종속되어 자본주의의 노리개가 될뿐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있을 수 있는 모습을 조혜정씨의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라는 책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더욱 문제는 사회전체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 땅에 있는 어느 누구도 대학이라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를 거부하게 될 경우 그들은 주위의 학원 따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순전히 교육을 사교육화하는 것일 뿐이다. 이럼으로써 권력은 교육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 너희들이 원해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됐으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우리의 현실에 있어 탈학교론은 비판적 의미를 가질 뿐이다. 우리는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에서만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곧 서로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는 스피노자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예전처럼 IMF 로 인한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횡행하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고, 과거를 바꾸려는 모습이 같다고 앞으로의 방향마저 일치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탈학교론은 또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국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학회 평론에서 문 아무개씨(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네요. 성이 맞을래나 ? ^^; ) 는 이한씨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국가의 개입이 빠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써 놓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말에 동의하며, 중요한 것은 국가의 개입이 아니라 국가의 '어떤' 개입이냐는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이한씨가 의존하고 있는 사람 중에 '닐' 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닐' 은 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중시했다. 이한씨 역시 이런 점을 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계급 재배에 중점을 둠으로써, 그리고 대학입시라는 우리의 현실을 간과함으로써 교육의 공공성을 파괴하게되는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져들게 되었다. 다시 교육 문제의 본질은 '권리' 로써 파악해야 한다. 서로의 권리가 서로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만났을 때 그 권리가 한층 증폭되는 그런 권리.
요컨대 이한씨가 '학교를 넘어서' 에 주장하고 있는 탈학교론은 지금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미는 가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대안적 의미는 가질 수 없다. 학교의 탈중심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옳을지는 몰라도 학교의 해체를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공교육을 대표하고 있는 학교는 분명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그 방향이 공교육을 축소 또는 부정하는 방향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공교육은 민중들의 투쟁으로 이룩해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교육의 중심 문제는 닐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각 주체들의 권리이어야 한다. 프레이리의 주장 대로 각 주체들의 능동성을 받아줄 수 있는 학교, 그리고 그런 실천이 문제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든다. 탈학교론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현실이라면 우리의 학교는 이미 바뀌어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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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안났는데, 내용을 다시 보니 99년쯤인가 보다. 문단만 정리해서 그대로 다시 올린다.
우선 전자의 사람들을 살펴보자. 이들의 의견은 학교를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학교를 지배계급의 의식 주입소로써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학교의 발생 상황을 해석하면서 자본의 요구에 부합하는 노동자들을 길러내기 위해서 학교, 근대적 학교가 만들어졌다고 결론짓는다. 비록 이런 학교 때문에 노동자들의 파생적 이익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학교의 본질은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발생학적 분석은 아니지만, 푸코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다. 푸코는 권력을 분석하면서, 학교와 군대가 일련의 주체를 생산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근대적 규율 체계로써의 학교말이다. 그렇다면 닐에게서는 어떤 것을 얻고 있는가. 닐은 '자율교육' 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전자의 사람들이 계급의 관점에서 학교의 해체를 주장했다면, 닐의 경우 '권리' 의 측면으로 교육 문제를 바라보았다고 볼 수 있다.
이한씨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이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학교의 경직성, 교사와 학생 사이에 벌어지는 종속 관계, 학생들의 객체화 따위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학교의 해체로써 나아간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써 교육화폐 운동이나, 홈스쿨링 그리고 네터워크 구성, 동아리의 활용 따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일단 학교가 과연 지배 계급의 이해 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가. '신자유주의와 한국교육의 진로' 에서 천보선씨와 김학한씨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들은 공교육 개념의 이면을 살핀다. 이들에 따르면 근대적 개념의 공교육은 프랑스 대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는 교육이라는 것은 몇 몇 귀족들, 특권층에기만 가능한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부르주아지들이 프랑스 대혁명을 승리로 이끌면서 교육은 그런 특권층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들 부르주아지까지도 포괄하기에 이른다. 또한 산업혁명 이후 프로레타리아트에게 있어, 교육은 부르주아지의 이해는 물론 그들 자신의 의식 함양에도 기여했다고 본다. 게다가 공교육으로써의 개념(국가 비용 부담)을 확고히 하게 되는 것은 이들 프로레타리아트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로 대표되고 있는 공교육은 바로 민중의 투쟁을 통해 이루어낸 성과라는 것이다.
공교육이라는 입장에서 보다 더 밀고 나아가야 하겠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교육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함께' 라는 의미밖에 가지지 못한다. 또는 좀더 완화해서 생각한다면 '국가의 교육 비용 보조' 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런 특성 때문에 공교육을 받으면서도 사교육비가 공교육에 포함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고 있다. 문제는 바로 사교육비이다. 탈학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록 계급의 관점에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현실에 있어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은 교육 예산이 늘어나기는 커녕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며, 더욱 나아가 사교육비의 지출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하며, 그 경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학교를 해체하고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홈스쿨링을 보자. 홈스쿨링을 하게 되면, 그 상황에서 교육자는 부모 또는 그 주위에서 수고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노동 계급의 부모를 생각해 보자. 아니 빈곤층을 보자. 이들에게 있어 자기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는 현실적인 능력이 있을까 ? 아니 그 주위에서 그럴만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까 ? 우리는 주위에서 홈스쿨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들을 분석해보자. 그들은 그것을 성공할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또는 어떤 모임을 만들어서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들어 탈학교 모임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지만, 과연 그 모임들이 홈스쿨링에 가해진 비판을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대학 입시' 라는 것이다. 소위 학력주의 또는 학벌주의, 달리 말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써의 지위경쟁이론 또는 임금경쟁이론으로 뒷받침 되고 있는 괴물 말이다. 이한씨는 자신의 책에서 '대학 입시' 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읽은지가 거의 1 년이 다 되어가고 지금 옆에 없는 상황이라... ^^;)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것으로써 학생들의 기계화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대안으로써 대학입시와 관련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제시된 대안은 대학입시에 종속되어 자본주의의 노리개가 될뿐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있을 수 있는 모습을 조혜정씨의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라는 책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더욱 문제는 사회전체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 땅에 있는 어느 누구도 대학이라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를 거부하게 될 경우 그들은 주위의 학원 따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순전히 교육을 사교육화하는 것일 뿐이다. 이럼으로써 권력은 교육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 너희들이 원해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됐으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우리의 현실에 있어 탈학교론은 비판적 의미를 가질 뿐이다. 우리는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에서만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곧 서로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는 스피노자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예전처럼 IMF 로 인한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횡행하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고, 과거를 바꾸려는 모습이 같다고 앞으로의 방향마저 일치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탈학교론은 또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국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학회 평론에서 문 아무개씨(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네요. 성이 맞을래나 ? ^^; ) 는 이한씨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국가의 개입이 빠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써 놓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말에 동의하며, 중요한 것은 국가의 개입이 아니라 국가의 '어떤' 개입이냐는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이한씨가 의존하고 있는 사람 중에 '닐' 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닐' 은 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중시했다. 이한씨 역시 이런 점을 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계급 재배에 중점을 둠으로써, 그리고 대학입시라는 우리의 현실을 간과함으로써 교육의 공공성을 파괴하게되는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져들게 되었다. 다시 교육 문제의 본질은 '권리' 로써 파악해야 한다. 서로의 권리가 서로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만났을 때 그 권리가 한층 증폭되는 그런 권리.
요컨대 이한씨가 '학교를 넘어서' 에 주장하고 있는 탈학교론은 지금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미는 가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대안적 의미는 가질 수 없다. 학교의 탈중심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옳을지는 몰라도 학교의 해체를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공교육을 대표하고 있는 학교는 분명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그 방향이 공교육을 축소 또는 부정하는 방향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공교육은 민중들의 투쟁으로 이룩해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교육의 중심 문제는 닐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각 주체들의 권리이어야 한다. 프레이리의 주장 대로 각 주체들의 능동성을 받아줄 수 있는 학교, 그리고 그런 실천이 문제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든다. 탈학교론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현실이라면 우리의 학교는 이미 바뀌어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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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안났는데, 내용을 다시 보니 99년쯤인가 보다. 문단만 정리해서 그대로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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