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달리는 소녀 > 를 보고...

20대 초반 시절, 꽤나 철학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를 사로잡았던 사람은 질르 들뢰즈라는 철학자였다. 그를 부를 때 많은 사람들은 '긍정의 철학자' 또는 '차이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얘기하다가 뜬금없이 웬 철학자 타령이냐고 ? 이 애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들뢰즈가 아니 내가 읽은 들뢰즈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그 시작을 철학사 연구에서 했다. 흔히들 얘기하는 비주류 철학자들을 역사속에서 재구성해 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멀리 둔스스코투스부터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와 베르그송에 이르기까지. 그의 해석은 다른 사람들이 오역이라고 일컬을 만큼 독특했고 창의적이었다. 요즘에는 이러한 오역을 자의적 오역이라고도 한다.

특히 니체에 대한 해석은 하이데거의 해석에 따라 니체가 파시즘을 옹호한 철학자라는 오명을 벗겨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차이를 인정한 철학자이지 결코 동일성을 옹호한 철학자는 아니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해석하면서 동일한 것만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오로지 동일한 것만이 반복되고 차이나는 것은 반복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차이나는 것은 사라지고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게르만 우월주의와 파시즘적 사고를 지탱하는 근거가 아니었을까 ? 그리고 저 끔찍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상적 배경임과 동시에...

하지만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하이데거와는 다르게 해석한다. 바로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모순이 될 듯한 말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며, 나 역시 동의한다. 그리고 이 애니에 이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굳이 도형을 이용해서 설명하자면 하이데거의 영원회귀가 완전한 원이라면, 들뢰즈의 영원회귀는 나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둘의 비교는 일상을 통해서 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이데거의 경우, 일상은 언제나 똑같은 것만이 반복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경우 일상은 반복은 되지만, 그 일상 속에는 언제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제의 일상이 다르고 오늘의 일상이 다르고 내일의 일상이 다를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자. 우연찮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마코토는, 필요할 때마다 자신이 되돌리고 싶은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시간은 반복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것이 반복되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해낼 수 있는 현실이 있는 것이다.

시간은 반복되지만 그 시간 안에서 마코토는 반복되지 않고, 마코토에게 모든 것이 연속적으로 기록된다. 이 두 요소가 합쳐지면서 나선형적인 시간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가 얘기한 영원회귀가 아니고 무엇일까 ? 오직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된다.

이번에는 이 애니에서 표현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세계관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겪는 우리의 시간관은 과거는 변할 수 없는 것이고,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 애니는 그러한 과거를 부정한다. 수많은 과거가 있으며, 그 과거의 영향이 현재를 현실화하고 미래를 선택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수많은 잠재 현재 가운데 과거의 특수한 조건에 맞추어서 현실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미래로 이어진다. 굳이 시각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X' 형태가 될 것이다. 가운데 접점이 바로 현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 수많은 잠재 현재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 또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

마코토는 이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할 때까지 타임립을 시도한다. 하지만 마지막 타임립을 시도하고 정말 필요한 순간 자신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때, 자신이 선택한 현재가 최선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 때, 또다른 존재, 치아키가 시간의 흐름에 개입하게 된다.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사건의 계열이 있고 그 사건의 계열을 이끌고 만들어내는 빈자리 X 가 있다. 끊임없이 타임립을 시도하면서 사건을 바꾸려고 했던 마코토가 바로 X 에 해당한다. 여기서 치아키는 또 다른 사건의 계열을 이루는 X 로서 두 빈자리 X 또는 특이점이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특이점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치아키는 미래로 사라지고, 마코토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자신이 타임립의 능력을 가지기 직전으로.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결국 수없이 많은 잠재 현재 중에서 동일한 것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 이후의 진행은 그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과연 어떤 현재를 선택해야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것은 긍정이다. 자신에 대한 긍정이다. 마코토가 끊임없이 타임립을 시도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 바로 치아키의 고백이었다. 치아키의 고백을 피하기 위해 그 수많은 타임립을 시도했던 것이다. 마코토는 깨닫는다. 왜 솔직하지 못했을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

치아키의 개입으로 얻게 된 마지막 타임립은 자신을 긍정하고나서야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들뢰즈는 하나의 긍정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중긍정.

자신을 긍정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간 마코토, 그리고 그런 마코토를 긍정하며 미래에서 기다리겠다는 치아키. 이것이 바로 이중긍정이다. 긍정이 아무 것에나 고개를 끄덕이는 바보같은 긍정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긍정에 대한 긍정, 이중긍정인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가장 오해받는 철학자 중의 하나가 니체이다. 특히 그의 니힐리즘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래서인지 이를 허무주의로 표현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는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라 말한다.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되는 방법이 바로 니힐리즘인 것이다. 니힐리즘은 동일한 것을 부수는 것이며,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의 노예일 경우에만 의미를 얻는 것이다.

바로 마코토가 마지막 타임립을 사용하서 치아키를 만났을 때, 타임립 충전장치를 파괴하는 행위가 바로 이러한 니힐리즘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 이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코토가 자신을 긍정했을 때이고, 치아키가 이러한 마코토를 이중긍정했을 때인 것이다.

길게 돌아왔는데, 우리는 어떻게 최선의 현재를 선택할 수 있을까 ?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마코토처럼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치아키처럼 미래로 돌아갈 수 없는데 말이다. 간단하다. 마코토와 치아키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스스로를 긍정하라고, 그리고 스스로 긍정하는 다른 이를 긍정하라고 말이다.

끝으로 생각해봐라. 자신을 긍정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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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7 년, 친목 게시판에 썼던  것을 거의 수정하지 않고 올린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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