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경으로 보는 인상주의 > 를 보고 와서...
지난 1 월13 일에 <풍경으로 보는 인상주의> 전시회를 보고 왔다.
가장 인기 있는 미술 사조가 인상주의라고 했다.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을 보고나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 졌다. 현대 미술처럼 난해하지도 않고, 고전(?) 미술들처럼 갑갑하지도 않은 그림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된 그림들은 인상주의의 발생기부터 소멸기까지 그려진 대표적인 풍경화들이다.
인상주의라는 게 발생한 곳이 프랑스이다보니, 많은 작품들이 프랑스 출신 작가들의 그림이다. 이들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보면서 드는 느낌은 전체적으로 형태가 뭉개져 있다는 것이고, 마치 대충 그린것 같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이런 느낌이 드는 까닭은, 기존의 엄격하고 규격화된 아카데미즘에 대한 항거로서 나타난 미술 사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배해 독일 인상주의 작가들의 모습을 보면, 프랑스 작가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독일 인상주의 작가들 역시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만, 그들보다는 보다 힘이 있고, 선명하며, 강렬했다. 마치 이후의 야수파로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보다도 훨씬 야수파같았다. 이들이 야수파 작품으로 분류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어쩌면 이러한 차이는 프랑스인들과 독일인들의 특성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전시의 마지막으로 가면서 인상주의를 계승하는 사조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점묘법을 바탕으로 하는 신인상주의였다. 점들을 무수히 찍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작가들의 노력이 대단하다고 생각됐다. 게다가 이 작품들 중에는, 요즘 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의 원조가 아닐까 하는 그림도 있었다. ^^
전시회에서는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 준다. 처음에는 몰랐다. 1/4 쯤 지나고 있는데 , 같이 관람하던 꼬마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표를 샀던 곳에 가서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 받아 몇 개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마지막 작품을 설명하면서 가이드가 인사를 하는데, 이제훈이었다. 깜짝 놀랐다. 알고 봤더니, 여기저기 이제훈이 오디오 가이드를 한다고 설명이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너무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던 것 같다. 대여료는 1 대당 3,000 원이다. 다소 비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어폰을 챙겨간다면 한 대로 두 명이 들을 수 있으니, 반값으로 충분히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클로드 모네의 <팔레즈의 안갯속 집>,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바다 너머의 석양>,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이었다.
<팔레즈의 안갯속 집> 은 오디오 가이드를 들을 수 있는데, 날씨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작가가 그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빛의 모습을 매우 훌륭하게 포착하고 있다며 극찬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저 소위 명작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이겠거니 했다. 뿌옇게만 보여서 와닿지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그림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안개와 안개 뒤에 흐릿하게 보이는 집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안개의 표현 기법이 신기했고, 어떻게 그런 모습을 포착해서 그릴 수 있었을까 감탄이 멈추지 않았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바다 너머의 석양> 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점묘법이다 보니 거리에 따라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가까이 보면 점 하나하나가 보였지만, 뒤로 물러나서 보면 그 하나 하나의 점들은 사라지고, 점들이 빚어내는 빛만이 남아, 그 당시 작가가 느꼈을 인상이 그대로 전달됐다. 게다가 그림 속의 일렁이는 파도에서는, 파도가 그림 밖으로 빠져나와 나에게 다가올 것만 같은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은 그 소재 특이성에서도 주목을 받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 누구도 주변의 채소를 그리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솔직히 미술사의 흐름을 잘 모른다고 하면 이 작품이 왜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다른 사조의 미술 작품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어쨌든 나 역시 미술사의 흐름에 능통하지 못하다보니 소재 자체가 무엇이 그리 특이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묶고 있는 끈이었다. 묘하게 돋아 있는 그 끈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함을 느꼈고, 마치 살아있고,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흐의 작품도 두 개 정도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랑글루아 다리> 이다. 다리 관리인의 이름이 랑글루아라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했다. 그림의 이름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니고, 고흐가 그린 그림치고 꽤나 밝은 그림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고흐가 이렇게 밝은 그림도 그렸었나 ? 하는 놀라움이 생겼었다. 인생 자체가 어두웠던 고흐도 이런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전시 작품들을 보는 내내 우리나라 미술사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인상주의가 대두되는 과정을 보면 우리나라 미술사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 미술의 과정을 간단하게 보면, 중세에는 종교(기독교) 미술이 지배했고,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으로 돌아와 영웅에 대한 서사와 상징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인상주의에 들어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미술의 과정도 비슷하다.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는 종교(불교) 미술이 지배했고, 조선 전기에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처럼 이상향에 대한 그림이 주류였으며, 중기에는 겸재 정선이 등장하여 이상향이나 상상 속의 중국 산수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산수를 직접 그리는 진경산수를 정착시켰고, 후기에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으로 대표되는 풍속화와 풍경화들이 주목받았다. 이후의 민화까지...
현대 한국 미술의 흐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인상주의 이후 서양 미술의 흐름에 비해 조선 이후 한국 미술의 흐름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 듯하다.
근대까지만 하더라도 흐름이 비슷하거나 한국 미술사의 흐름이 오히려 앞서기도 한다고 본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대중화의 실패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경우, 관이나 종교계에서 의뢰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대부분 예술가는 어느 기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에 반해 조선의 경우, 도화원/도화서에서 화가들을 모아 필요한 그림들을 그렸다. 또는 그 출신들이 작품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흐름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었고, 간혹 등장하는 천재들이 기존의 흐름을 바꾸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미술이 서양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낸 것은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민간 주도였던 서양 미술에 비하여, 관주도였던 조선 미술은 그 한계가 분명했다고 본다.
이러한 사례들은 미술 이외의 분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최초로 불리는 금속 활자 기술이라든지, 또는 온실이라든지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쿠텐베르크 이전에 금속 활자 기술을 개발하여 쓰고 있었지만, 그 목적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필요한 책들을 인쇄하는데 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등장하는 민간 서책은 이러한 인쇄술로 출판된 것이 아니라, 필사를 통해 출판되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어려웠고, 따라서 공급도 그리 원활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유럽의 경우 쿠텐베르크가 개발한 인쇄술을 바탕으로 대중을 위한 책을 대량으로 공급하였다. 이로 인해, 다양한 책들이 대규모로 생산되어 대중에게 쉽게 공급될 수 있었다. 이는 다시 인쇄술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온실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의 온실 기술은 오직 왕실만을 위해서 쓰였다고 한다. 만일 이 온실 기술을 발전시켜 백성들이 쉽게 쓸 수 있도록 하였다면 백성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온실 기술 역시 함께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미술, 특히 조선의 미술이나 금속활자 그리고 온실 기술 등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루었지만, 서양처럼 지속적으로 발전하거나 다채로운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그 대상이 대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실이나 사대부 등의 특권층을 위해서만 쓰였기 때문에, 대중화에 실패하였고, 그렇다보니 경직화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간혹 천재들이 나와 그 흐름을 바꾸어 놓기는 했지만, 다양성을 확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풍경으로 보는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인상주의의 발생과 소멸 그리고 그 이후의 서양 미술 사조의 흐름을 보면서, 인상주의 자체에 대한 감상도 감상이었지만, 이에 대비되는 우리나라의 미술 흐름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와 함께 서양의 미술 사조가 아닌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흐름도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인기 있는 미술 사조가 인상주의라고 했다.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을 보고나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 졌다. 현대 미술처럼 난해하지도 않고, 고전(?) 미술들처럼 갑갑하지도 않은 그림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된 그림들은 인상주의의 발생기부터 소멸기까지 그려진 대표적인 풍경화들이다.
인상주의라는 게 발생한 곳이 프랑스이다보니, 많은 작품들이 프랑스 출신 작가들의 그림이다. 이들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보면서 드는 느낌은 전체적으로 형태가 뭉개져 있다는 것이고, 마치 대충 그린것 같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이런 느낌이 드는 까닭은, 기존의 엄격하고 규격화된 아카데미즘에 대한 항거로서 나타난 미술 사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배해 독일 인상주의 작가들의 모습을 보면, 프랑스 작가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독일 인상주의 작가들 역시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만, 그들보다는 보다 힘이 있고, 선명하며, 강렬했다. 마치 이후의 야수파로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보다도 훨씬 야수파같았다. 이들이 야수파 작품으로 분류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어쩌면 이러한 차이는 프랑스인들과 독일인들의 특성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전시의 마지막으로 가면서 인상주의를 계승하는 사조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점묘법을 바탕으로 하는 신인상주의였다. 점들을 무수히 찍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작가들의 노력이 대단하다고 생각됐다. 게다가 이 작품들 중에는, 요즘 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의 원조가 아닐까 하는 그림도 있었다. ^^
전시회에서는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 준다. 처음에는 몰랐다. 1/4 쯤 지나고 있는데 , 같이 관람하던 꼬마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표를 샀던 곳에 가서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 받아 몇 개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마지막 작품을 설명하면서 가이드가 인사를 하는데, 이제훈이었다. 깜짝 놀랐다. 알고 봤더니, 여기저기 이제훈이 오디오 가이드를 한다고 설명이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너무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던 것 같다. 대여료는 1 대당 3,000 원이다. 다소 비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어폰을 챙겨간다면 한 대로 두 명이 들을 수 있으니, 반값으로 충분히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클로드 모네의 <팔레즈의 안갯속 집>,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바다 너머의 석양>,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이었다.
<팔레즈의 안갯속 집> 은 오디오 가이드를 들을 수 있는데, 날씨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작가가 그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빛의 모습을 매우 훌륭하게 포착하고 있다며 극찬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저 소위 명작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이겠거니 했다. 뿌옇게만 보여서 와닿지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그림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안개와 안개 뒤에 흐릿하게 보이는 집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안개의 표현 기법이 신기했고, 어떻게 그런 모습을 포착해서 그릴 수 있었을까 감탄이 멈추지 않았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바다 너머의 석양> 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점묘법이다 보니 거리에 따라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가까이 보면 점 하나하나가 보였지만, 뒤로 물러나서 보면 그 하나 하나의 점들은 사라지고, 점들이 빚어내는 빛만이 남아, 그 당시 작가가 느꼈을 인상이 그대로 전달됐다. 게다가 그림 속의 일렁이는 파도에서는, 파도가 그림 밖으로 빠져나와 나에게 다가올 것만 같은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은 그 소재 특이성에서도 주목을 받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 누구도 주변의 채소를 그리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솔직히 미술사의 흐름을 잘 모른다고 하면 이 작품이 왜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다른 사조의 미술 작품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어쨌든 나 역시 미술사의 흐름에 능통하지 못하다보니 소재 자체가 무엇이 그리 특이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묶고 있는 끈이었다. 묘하게 돋아 있는 그 끈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함을 느꼈고, 마치 살아있고,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흐의 작품도 두 개 정도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랑글루아 다리> 이다. 다리 관리인의 이름이 랑글루아라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했다. 그림의 이름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니고, 고흐가 그린 그림치고 꽤나 밝은 그림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고흐가 이렇게 밝은 그림도 그렸었나 ? 하는 놀라움이 생겼었다. 인생 자체가 어두웠던 고흐도 이런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전시 작품들을 보는 내내 우리나라 미술사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인상주의가 대두되는 과정을 보면 우리나라 미술사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 미술의 과정을 간단하게 보면, 중세에는 종교(기독교) 미술이 지배했고,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으로 돌아와 영웅에 대한 서사와 상징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인상주의에 들어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미술의 과정도 비슷하다.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는 종교(불교) 미술이 지배했고, 조선 전기에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처럼 이상향에 대한 그림이 주류였으며, 중기에는 겸재 정선이 등장하여 이상향이나 상상 속의 중국 산수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산수를 직접 그리는 진경산수를 정착시켰고, 후기에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으로 대표되는 풍속화와 풍경화들이 주목받았다. 이후의 민화까지...
현대 한국 미술의 흐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인상주의 이후 서양 미술의 흐름에 비해 조선 이후 한국 미술의 흐름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 듯하다.
근대까지만 하더라도 흐름이 비슷하거나 한국 미술사의 흐름이 오히려 앞서기도 한다고 본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대중화의 실패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경우, 관이나 종교계에서 의뢰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대부분 예술가는 어느 기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에 반해 조선의 경우, 도화원/도화서에서 화가들을 모아 필요한 그림들을 그렸다. 또는 그 출신들이 작품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흐름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었고, 간혹 등장하는 천재들이 기존의 흐름을 바꾸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미술이 서양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낸 것은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민간 주도였던 서양 미술에 비하여, 관주도였던 조선 미술은 그 한계가 분명했다고 본다.
이러한 사례들은 미술 이외의 분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최초로 불리는 금속 활자 기술이라든지, 또는 온실이라든지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쿠텐베르크 이전에 금속 활자 기술을 개발하여 쓰고 있었지만, 그 목적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필요한 책들을 인쇄하는데 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등장하는 민간 서책은 이러한 인쇄술로 출판된 것이 아니라, 필사를 통해 출판되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어려웠고, 따라서 공급도 그리 원활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유럽의 경우 쿠텐베르크가 개발한 인쇄술을 바탕으로 대중을 위한 책을 대량으로 공급하였다. 이로 인해, 다양한 책들이 대규모로 생산되어 대중에게 쉽게 공급될 수 있었다. 이는 다시 인쇄술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온실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의 온실 기술은 오직 왕실만을 위해서 쓰였다고 한다. 만일 이 온실 기술을 발전시켜 백성들이 쉽게 쓸 수 있도록 하였다면 백성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온실 기술 역시 함께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미술, 특히 조선의 미술이나 금속활자 그리고 온실 기술 등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루었지만, 서양처럼 지속적으로 발전하거나 다채로운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그 대상이 대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실이나 사대부 등의 특권층을 위해서만 쓰였기 때문에, 대중화에 실패하였고, 그렇다보니 경직화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간혹 천재들이 나와 그 흐름을 바꾸어 놓기는 했지만, 다양성을 확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풍경으로 보는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인상주의의 발생과 소멸 그리고 그 이후의 서양 미술 사조의 흐름을 보면서, 인상주의 자체에 대한 감상도 감상이었지만, 이에 대비되는 우리나라의 미술 흐름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와 함께 서양의 미술 사조가 아닌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흐름도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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