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자본 > 을 읽고...
마침내 읽었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참 오래 걸렸다. 책이 두껍기도 하고, 책을 그렇게 빨리 읽는 편도 아니어서 더욱 오래 걸렸다. 하지만 마침내 읽었다. ^^
<21세기 자본> 의 특징은 역사적 고찰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바뀌어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필연성을 부정한다. 이에 따라 결국 자본주의가 멸망하고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맑스의 견해에도 비판을 가한다. 그러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이러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몇 가지 관계식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자본주의 제1기본법칙이라는 것으로 다음의 관계가 있다.
이 법칙은 항등식이다. 따라서 언제나 성립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어느 한 시대의 상황을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장기적 변화를 예측하기에는 부족하다. 여기에서 β(자본/소득)에 대한 또다른 관계식이 등장한다. 피케티는 동역학 방정식이라 부른다.
따라서 β(자본/소득)은 s(저축률) 과 g(성장률)에 따라서 달라진다. 성장률이 낮은 상황에서 저축률이 높아지면, 자본의 총량이 증가하게 된다. 이것이 곧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차이를 불러오게 된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것이다.
피케티는 이것이 불평등의 근본원인이라고 판단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r(자본수익률)은 언제나 g(성장률)보다 컸다. 이는 노동을 통한 소득보다 자본을 통한 소득이 훨씬 크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r(자본수익률)은 점점 커지고 있고, g(성장률)은 점점 낮아지거나 대체로 낮은 상태에서 유지가 되기 때문에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이뿐만 아니라 노동소득 자체에서도 차별이 생기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대기업 CEO 들의 연봉이다. 수억에서 수십억 또는 수백억에 이르는 그들의 연봉을 일반 직원들과 비교했을 때 그 차이를 보면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원인을 들라면 r(자본수익률) 이 언제나 g(성장률) 보다 크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초기 투입 자본의 양에 따라 부가 결정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학벌없는 사회> 라는 시민단체가 해체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더이상 우리사회는 학벌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인가 ? 바로 상속 사회인 것이다. 금수저/흙수저 논란이 상속 사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적어도 학벌사회에서는 능력주의가 어느 정도는 작동하고 있었다. "개천에서 용났다" 는 말이 여전히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능력만으로 부를 쌓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오직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부를 쌓을 수 있게 되었고, 학벌이 의미가 있다면 오직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게 된 것이다. 상속사회로 완전히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피케티는 이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까 ? 대표적으로 글로벌 누진 자본세를 주창한다. 벌어들인 것(소득세)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자본세)에도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세계 모든 은행들의 계좌에 접근할수있어야 한다고도 한다. 그리고 일부 국가 말고 전세계가 모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은 풍선 효과처럼 자본세가 있는 지역에서 자본세가 없는 지역으로 이동할테니까.
피케티는 스스로도 이 해결책이 이상적인 제안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항변한다. 지금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여러 제도들 역시 과거에는 이상적인 제안 중의 하나였다고. 어쩌면 언젠가 글로벌 누진 자본세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양극화의 문제를 역사적 고찰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 그의 방법은 꽤나 유의미하다. 그리고 사회를 바꾸어 가고, 제도를 만들어 자본을 통제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피케티의 주장이 마음 속 깊숙히 와닿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이 전부는 아니다. 피케티의 방법대로 현재의 역사성을 이해한다면 지금과는 또다른 미래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낸 미래말이다.
<21세기 자본> 의 특징은 역사적 고찰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바뀌어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필연성을 부정한다. 이에 따라 결국 자본주의가 멸망하고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맑스의 견해에도 비판을 가한다. 그러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이러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몇 가지 관계식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자본주의 제1기본법칙이라는 것으로 다음의 관계가 있다.
α = r * β
(α : 자본소득 / 국민소득, r : 자본수익률, β : 자본총량/국민소득)
이 법칙은 항등식이다. 따라서 언제나 성립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어느 한 시대의 상황을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장기적 변화를 예측하기에는 부족하다. 여기에서 β(자본/소득)에 대한 또다른 관계식이 등장한다. 피케티는 동역학 방정식이라 부른다.
β = s / g
(β : 자본/소득, s : 저축률, g : 성장률)
따라서 β(자본/소득)은 s(저축률) 과 g(성장률)에 따라서 달라진다. 성장률이 낮은 상황에서 저축률이 높아지면, 자본의 총량이 증가하게 된다. 이것이 곧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차이를 불러오게 된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것이다.
r > g
(r : 자본수익률, g : 성장률)
피케티는 이것이 불평등의 근본원인이라고 판단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r(자본수익률)은 언제나 g(성장률)보다 컸다. 이는 노동을 통한 소득보다 자본을 통한 소득이 훨씬 크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r(자본수익률)은 점점 커지고 있고, g(성장률)은 점점 낮아지거나 대체로 낮은 상태에서 유지가 되기 때문에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이뿐만 아니라 노동소득 자체에서도 차별이 생기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대기업 CEO 들의 연봉이다. 수억에서 수십억 또는 수백억에 이르는 그들의 연봉을 일반 직원들과 비교했을 때 그 차이를 보면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원인을 들라면 r(자본수익률) 이 언제나 g(성장률) 보다 크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초기 투입 자본의 양에 따라 부가 결정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학벌없는 사회> 라는 시민단체가 해체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더이상 우리사회는 학벌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인가 ? 바로 상속 사회인 것이다. 금수저/흙수저 논란이 상속 사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적어도 학벌사회에서는 능력주의가 어느 정도는 작동하고 있었다. "개천에서 용났다" 는 말이 여전히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능력만으로 부를 쌓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오직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부를 쌓을 수 있게 되었고, 학벌이 의미가 있다면 오직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게 된 것이다. 상속사회로 완전히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피케티는 이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까 ? 대표적으로 글로벌 누진 자본세를 주창한다. 벌어들인 것(소득세)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자본세)에도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세계 모든 은행들의 계좌에 접근할수있어야 한다고도 한다. 그리고 일부 국가 말고 전세계가 모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은 풍선 효과처럼 자본세가 있는 지역에서 자본세가 없는 지역으로 이동할테니까.
피케티는 스스로도 이 해결책이 이상적인 제안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항변한다. 지금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여러 제도들 역시 과거에는 이상적인 제안 중의 하나였다고. 어쩌면 언젠가 글로벌 누진 자본세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양극화의 문제를 역사적 고찰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 그의 방법은 꽤나 유의미하다. 그리고 사회를 바꾸어 가고, 제도를 만들어 자본을 통제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피케티의 주장이 마음 속 깊숙히 와닿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이 전부는 아니다. 피케티의 방법대로 현재의 역사성을 이해한다면 지금과는 또다른 미래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낸 미래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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